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투트모세 3세 (문단 편집) === 정복 전쟁 === 하트셉수트가 죽은 이후 본격적인 친정에 나선 투트모세 3세는 20년간 무려 17차례에 달하는 정복 사업을 펼쳤다.[* 17차례도 최소한으로 잡은 수치. 기록이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은 것까지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파라오는 군사 방면에서는 천재였고, 덕분에 이집트는 역사상 최대 규모로 빠른 확장을 거듭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생 동안 350개의 도시를 정복했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중동 지방으로부터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는 [[누비아]]까지 온갖 곳을 종횡무진하며 영토를 넓혔다. 참고로 유프라테스 강을 넘은 것은 [[투트모세 1세]] 이래 처음일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투트모세 3세는 후대의 [[람세스 2세]] 대왕에 비견될 정도로 이집트를 국제적인 패권을 휘두르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한 정복왕으로, 이집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투트모세 3세를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전쟁광으로 꼽고는 한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룩소르|테베]]의 카르나크 대신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알려진 것의 대부분은 카르나크의 벽화를 보고 알아낸 것들.] 투트모세 3세 지휘 하의 이집트 군이 연전연승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 제2중간기|제2중간기]] 시절 힉소스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차]]의 영향이 컸다. 당시 힉소스인들이 끌던 전차의 위력을 실감한 이집트가 대대적인 전차 병단을 꾸리면서 이집트 군대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죽은 직후부터 전쟁에 나서야 했다. 하트셉수트가 죽은 지 채 2달도 되지 않아 인근 카데시의 왕[* 인근 [[가나안]] 계열의 왕국.]이 군대를 끌고 메기도 지방으로 쳐들어왔던 것. 소식을 들은 투트모세 3세는 바로 대군을 편성해 메기도로 향했다. 해안을 따라 북상한 투트모세 3세는 2개월의 강행군 끝에 적군이 버티고 있는 메기도 인근에 다다랐다. 당시 메기도와 투트모세 3세 사이에는 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투트모세 3세는 산맥을 넘어가기 위해 3가지의 방법들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다. 산을 북쪽과 남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방법이 각각 1개씩 있었고, 왕실 신하들은 산맥을 우회하는 경로가 가장 안전하다고 고했다. 그러나 투트모세 3세는 신하들의 제언이 겁에 질린 것이라 생각해 물리쳤다. 대신 그는 산맥 가운데로 뚫려 한 사람씩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를 통해 산을 바로 돌파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대성공했다. 투트모세 3세의 군대는 바로 적군 사이에서 쏟아나왔고, 산맥에서 이집트 병사들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적군은 쓸려나갔다. 적군은 패퇴해 메기도 성벽 안에서 농성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 투트모세 3세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로 귀환했다. || [[파일:ginxemxa-741x388.jpg|height=300]] || 투트모세 3세가 치른 것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투[* 각각 1만 명 정도가 부딪혔던 것으로 추정된다.]였던 메기도 전투로 인해 중동 정세가 급변했다. 가나안 북부와 시리아가 이집트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의 왕들이 이집트에 선물을 보내면서 이집트의 명성은 급상승했다. 메기도 전투를 통해 이집트군의 힘을 널리 알린 투트모세 3세는 크게 고무되었다. 파라오의 2차, 3차, 4차 원정은 주로 가나안과 [[시리아]] 일대가 도착지였는데, '원정'이라는 거창한 말과는 달리 그냥 한 번 일대의 조공국들을 쭉 순회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투트모세 3세가 재위 40년 차에 남긴 방대한 양의 원정 기록문에 이때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정말 별 것 없었던 원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적힌 것이라고는 각지의 군주들이 알아서 조공을 바쳤다는 것, 그리고 인근의 [[아시리아]] 왕이 다시 파라오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 마지막으로 [[레바논]] 일대에 요새와 군사기지들을 지어 방비를 보강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이집트의 영향권이 닿는 영토들을 한 번 쭉 순회한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 지방으로 5차, 6차, 7차 원정을 떠났다. 투트모세 3세는 재위 29년 차에 5차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시리아에 위치한 [[페니키아]] 계열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아무래도 영토를 정복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재물을 약탈하고 노예들을 끌고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파라오는 [[비블로스]]와 인근 [[지중해]]의 항구들을 통해 함대로 병사들을 시리아로 파견했다. 투트모세 3세는 6차 원정에서 가나안 지방을 그대로 지나쳐 요르단 강 계곡으로 들어갔고, 군대를 몰고 북상해 카데시가 다스리는 영토들을 싸그리 약탈했다. 또한 도시들을 다스리는 귀족들에게서 일부러 포로들을 뜯어내 혹여나 일어날 반란을 방지했으며, 인근의 강대국 [[미탄니]]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다만 포로들을 이집트에 잡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투트모세 3세는 재위 31년 차에 7차 원정을 떠나 반란을 강제로 진압해야만 했다. 7차 원정을 통해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고자 했던 투트모세 3세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 주민들을 몰살한 후, 그 곳의 곡식을 포함해 모든 재물들을 이집트군이 주둔하는 기지와 항구에 쌓아놓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리아인들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에 협력해야만 했다. 시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한 투트모세 3세는 [[인도아리아인]] 계열 국가이자 당대 중동의 패권을 쥐고 있던 [[미탄니]]를 공격했다. 그러나 미탄니를 치기 위해서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야 했기에, 파라오는 배를 타고 [[비블로스]]까지 항해한 후 그 곳에서 배를 만들어 병사들에게 끌고 가도록 시켰다. 그는 이미 저번 원정에 정복했던 도시들을 재약탈하면서 평범한 시리아 원정인 것처럼 미탄니를 속였다. 투트모세 3세는 [[알레포]]와 칼케미쉬 등의 적대국가들이 다스리는 영토를 그대로 지나쳐 빠른 속도로 유프라테스 강을 도강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가 유프라테스 강에 도달한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 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유역에 진출한 대역사였다. 이 당시 이집트 인들은 나일 강만 보고 살았기에, 나일 강과 반대로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강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투트모세의 칭호 중에는 '역류를 건넌 자' 라는 호칭이 있다.] 유프라테스 강을 지키고 있던 미탄니 군대는 전혀 이집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햇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탄니는 이집트 병사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허사로 돌아갔고, 투트모세 3세는 대군을 이끌고 미탄니 일대를 휩쓸었다. 공포에 질린 미탄니 귀족들은 도시에서 도망쳐 인근 산맥의 동굴이나 은신처에 숨어버렸고 이집트 군대는 텅 비어버린 도시를 마음껏 약탈했다. [* 투트모세 3세는 이때 할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세운 기념비 옆에 자신의 정복 기념비를 세우고는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돌아왔다. 또한 시리아에서 코끼리 사냥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였는데, 그 외에도 다양한 동물들을 이집트로 데리고 와 [[아문]]의 대신전인 카르나크 신전에 바쳤다. 이 모든 정복 사업이 [[람세스 2세]]마냥 쩌리 의혹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다.] 미탄니에서는 뒤늦게서야 군대를 모아 이집트 병사에 맞서려 시도했지만 한 번 작정하고 쳐들어온 투트모세 3세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투트모세 3세는 유유히 미탄니를 유린한 후 막대한 전리품을 실은 배를 타고 이집트로 귀환했다. 재위 34년 차에 치러진 투트모세 3세의 9차 원정은 시리아가 주무대였고 별 것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냥 반-유목민 집단이 거주하고 있던 시리아 인근을 약탈한 정도로 여겨지는데, 심지어 전리품 목록도 상당히 보잘것없기에 제대로 된 약탈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차 원정은 꽤나 강렬했다. 8차 원정 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칼을 갈고 있던 미탄니는 꾸준히 군대를 모아 이집트를 칠 준비를 했고, 재위 35년 되는 해에 바로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다. 투트모세 3세와 미탄니 왕은 [[알레포]] 근처에서 대격돌했고, 이집트 측 기록에 의하면 투트모세 3세는 여기서도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물론 이집트 파라오가 졌다고 기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 치고는 사로잡은 포로가 10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등 노획한 전리품 목록이 워낙 협소해 학계에서 대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아마 미탄니에게 약간 우세를 점하거나 필사적인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굳이 투트모세 3세의 승리일 것이라 추정하는 이유는 전투가 끝난 후 [[히타이트]]의 왕이 파라오에게 선물과 조공을 보냈기 때문. 11차 원정과 12차 원정에 대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각각 재위 36년과 37년 되는 해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이지만 자세한 원정의 경위는 알려진 바 없다. 13차 원정에서는 9차 원정 때 공격했던 도시들 중 하나인 누카쉬셰를 재공격, 14차 원정 때에는 유목민족인 샤수족[* [[레바논]]부터 [[에돔]] 지방까지 넓게 퍼져 살던 유목집단들 중 하나.]의 공격을 맞아 싸웠다. 14차 원정 이후에 벌어진 15차, 16차, 17차 원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나 실시 연도는 기록이 훼손되어 정확히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연이은 패배로 앙금이 깊게 쌓였던 미탄니가 끊임없이 시리아의 도시들을 선동하여 이집트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는 것이고, 투트모세 3세는 죽을 때까지 이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는 것이다. 미탄니가 시리아인들을 선동하는 것을 선제 차단하기 위해 투트모세 3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안가에 주둔하던 이집트군을 데리고 카데시로 재진격, 인근의 미탄니 요새 3개를 함락한 뒤 이집트로 돌아와 개선식을 치렀다. 말년에는 나일 강 상류의 누비아를 정복하여 나일 강의 네 번째 폭포까지 진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정복사업이 되었다. 기원전 1425년 54세를 일기로 그의 영혼은 검은 땅을 떠났으며, 그의 무덤은 선왕들과 같은 [[왕가의 계곡]] KV34에 조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